소비 부진 탓에 은행예금 증가?…예금에 대한 잘못된 통념

김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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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 닥치면 정부와 중앙은행이 돈을 풀지만, 경기부양 효과가 기대에 못 미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등장하는 언론 보도는 이렇다. ‘확장적인 통화·재정정책에도 소비와 투자가 부진한 탓으로 은행 예금만 늘어나고 있다.’
외신도 예외가 아니다. 몇 달 전 중국경제의 디플레이션 우려를 소개하는 외신은 “코로나 봉쇄 해제 뒤 다른 나라에선 보복 소비가 보이지만 중국에선 반대로 보복 예금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모두 잘못이다. 예금 증가를 소비 부진 탓으로 간주하는 숱한 보도들은, 우리가 예금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내가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나의 예금은 줄지만 식당과 가게 사장님의 예금은 는다. 내가 소비하면 나의 예금은 줄고 거래 상대방의 예금이 늘 뿐, 예금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식당과 가게 사장님이 번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않고 현금으로 보관하는 경우뿐이다.
주식 등 금융상품 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경기 전망이 호전되고 위험자산 선호 심리가 높아지면, 사람들은 은행 예금을 해지하고 펀드에 투자한다. 이를 두고 자금이 은행권에서 자본시장으로 이동한다며 ‘머니 무브’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역시 잘못이다. 내가 주식을 사면 내 예금은 줄어들지만, 나에게 주식을 판 사람의 예금은 늘어난다. 나의 주식 매수를 위해 은행계좌에서 빠져나간 돈은, 나에게 주식을 매도한 사람의 은행계좌로 들어간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매도자가 매도금액을 현금으로 보관하는 경우뿐이다.

반복되는 오해와 착각
이러한 오해와 착각의 근저에는 예금에 대한 그릇된 통념이 있다. 예금은 돈을 보관하는 방식이자 형태일 뿐이고, 돈을 쓸 때는 현금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유자금을 은행에 맡길 때, ”은행에 예금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예금과 현금을 구별하는 적절한 방식이 아니며, 예금이 대표적인 지급수단이라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중앙은행이 지급수단으로서의 화폐 발행을 독점하고 있다는 오해를 조장한다는 점에서도 잘못된 통념이다.
예금은 은행의 채무증서다. 내가 요구할 경우 언제나 해당 금액을 지급하겠다는 은행의 약속을 담은 증서란 얘기다. 은행의 지급 약속이 사회적으로 신뢰받는다면, 이 채무증서는 일상 거래에서 지급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누구도 그 지급능력을 의심하지 않는, 대기업 회장님이 지급을 약속한 백지수표가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에피소드를 소재로 삼은 오래전의 국내 영화를 상기해봐도 된다. 그 백지수표가 사실상의 화폐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은행의 채무증서인 예금은 화폐다.
은행의 채무증서는 두 가지 경로로 발행된다. 첫째, 내가 은행에 현금을 맡기고, 그 대가로 예금이라는 채무증서를 받을 수 있다(1억원을 맡기면, 은행은 1억원이 입금된 통장을 발급해준다). 둘째, 내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때, 은행은 나에게 대출금액에 해당하는 채무증서를 발급한다(1억원을 대출받으면, 은행은 1억원이 입금된 통장을 발급해준다). 은행은 나를 대상으로 대출금액에 상응하는 채권을 보유하며, 나는 은행의 채무자가 되지만, 동시에 은행이 건네준 채무증서를 화폐로 사용한다.
첫째 경로가 모두에게 친숙한 방식이라면, 두번째 경로는 은행이 ‘대출을 통해 예금(화폐)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첫째 경로에서 통화량은 변하지 않지만, 두번째 경로에선 통화량은 대출을 통해 만들어진 예금액만큼 늘어난다. 그래서 은행은 단지 예금과 대출을 ‘중개’하는 기관이 아니라, ‘화폐를 만들어내는’ 기관이다.
은행이 화폐를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사회적인 신뢰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은행 면허를 통해 이러한 채무증서의 발급 권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신’이라는 은행의 기능은, 자신의 채무증서를 보편적인 지급수단, 즉 화폐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이다.
내가 계좌이체나 송금을 통해 예금을 타인에게 보내는 행위는, 나의 거래은행이 발급한 채무증서를 타인의 거래은행에 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송금 과정에서 은행들은 타 은행이 발급한 채무증서를 보유하게 된다. 은행이 남다른 사회적 신뢰를 보유했다고 하지만, 은행의 채무증서는 본질적으로 사기업이 발행한 채무증서일 뿐이다. 그래서 은행들 간 거래의 최종 정산은 사기업의 채무증서가 아닌, 공적 기관이 발행한 더욱 안전하고 믿을만한 증서로 이루어져야 한다.

민간은행의 역할, 중앙은행의 기능
이 거래의 최종적인 정산을 지급(payment)과 구별되는 결제(settlement)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결제에 쓰이는 자산이 바로 은행들이 중앙은행에 예치한 준비금이다. 민간은행의 채무증서인 예금이 지급수단(payment instrument)으로 사용되며, 중앙은행의 부채인 준비금이 결제자산(settlement asset)으로 기능하는 체제가 바로 현대의 이중통화제도(two-tiered monetary system)다. 이 제도는 민간은행이 지급수단을 제공하고, 공공(중앙은행)이 결제자산을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이중통화제도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은 일상적 거래에 사용되는 지급수단의 제공이 아니다. 일상적 지급수단은 민간은행이 만들어낸 예금화폐가 담당한다.
중앙은행의 주요 기능은 평상시의 통화정책과 비상시의 최종대부자 기능이다. 모두 준비금과 관련된 기능이다. 일반적인 통화정책은 준비금 시장에서 형성되는 단기금리를 통제하는 정책이다. 중앙은행은 민간은행들이 준비금의 일시적 과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이용하는 준비금 시장에서 형성되는 단기금리를 통제함으로써 민간화폐의 발행과 장기시장금리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최종대부자 기능은 준비금이 부족하지만 민간의 준비금시장에서 조달하기 어려운 은행을 대상으로 준비금을 빌려주는 기능이다. 이는 비상시 최종대부의 대상이 원칙적으로 중앙은행에 준비금 계좌를 보유한 금융기관들, 즉 상업은행으로 한정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지급수단으로서의 민간화폐와 결제자산으로서의 공공화폐가 공존하는 시스템에 대한 오해, 그리고 이와 관련된 중앙은행의 기능에 대한 오해는 서두에서 인용한 잘못된 언론보도에 그치지 않는다. 수년 전부터 개발 목적과 문제의식이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를 둘러싼 논란에도 이러한 오해의 흔적이 있다.

소매형 CBDC 발행 주장이 빛바랜 이유
소매형 시비디시(CBDC·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화폐)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따르면, 전자화폐가 널리 사용되면서 현금 사용이 줄어들고 있는 현실은 중앙은행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현금이라는 중앙은행 화폐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일반 대중과 중앙은행 화폐와의 접점이 사라지며, 이에 따라 통화정책의 전달경로가 약화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화에 대응하여 현금 대신 사용되는 디지털화된 중앙은행 화폐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앙은행이 새로운 디지털 지급수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유사한 문제제기는 20여년 전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정보통신기술로 인한 변화와 혁신이 화두이던 2000년 전후, 지급결제시스템의 변화와 전자화폐 확산으로 현금 사용이 줄어들고 있어서 통화정책이 무력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화폐경제학자인 마이클 우드포드(Michael Woodford) 교수는,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유효성은 대중의 현금사용 여부와 무관하며, 단지 준비금 시장에서의 단기금리에 대한 중앙은행의 통제력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중앙은행 제도의 탄생은 다양한 민간화폐가 지급수단으로 사용되던 시절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민간화폐를 금지하고 공공화폐가 지급수단 기능을 독점하는 이 제기된 바 있으나, 결국 채택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만들어진 것이 민간화폐의 지급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보장하되, 최종 결제는 중앙은행 화폐로 하는 체제, 즉 현재의 이중통화체제다. 우드포드 교수의 주장은 이중통화체제의 문제의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19세기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면, 21세기에도 혼란을 반복하게 된다. 최근 시비디시를 둘러싼 논의 지형을 보면, 소매형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대신 민간 지급수단의 혁신에 대응하는 플랫폼으로서 도매형 시비디시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부상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평가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위 내용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필자가 소속된 기관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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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일섭 예금보험공사 예금보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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